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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중간한 사람

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남은 게 없는 느낌

2026년 10월 4일 · 다른 언어: english

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어. 너무 어중간하게 살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거.

공부도 하고, 언어도 배우고,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도 했어. 근데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"이건 진짜 내 거다" 싶은 게 없어. 다 조금씩만 해 봤고, 뭐 하나 끝까지 판 게 없는 느낌.

주변 친구들을 보면 더 그래. 다들 자기 취향이 있거든.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, 쓰는 향수가 있고, 좋아하는 영화,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. 그게 거의 그 사람 자기소개 같아. 근데 나는 물어보면 잘 모르겠어. 다 그냥 그래. 흐릿해.

예전엔 그게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인 줄 알았어. 근데 요즘은 왜 그런지 좀 따져 보고 있어.

세 가지 상태

내 하루하루는 대충 세 가지 중 하나야.

하나는 모든 게 다 버거운 상태. 사소한 것도 스트레스고, 다 그만두고 싶어져.

하나는 멍한 상태. 아무 느낌이 없어. 슬픈 것도 덜하지만 좋은 것도 같이 덜해. 그냥 하루가 흘러가.

나머지 하나는 붕 뜬 상태. 생각이 막 튀고, 일을 잔뜩 벌이고, 잠도 별로 안 필요한 것 같아. 그땐 기분이 좋은데, 끝나고 나면 벌여 놓은 것들만 남아.

문제는 이 사이에 "그냥 나"로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거야. 기분이 계속 나를 끌고 다녀. 그러니까 뭘 쌓을 수가 없어. 좀 쌓을 만하면 다음 상태가 와서 무너뜨리니까.

취향도 똑같아. 취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거래. 이것저것 접해 보고, 뭐가 좋았는지 계속 신경 쓰다 보면 생기는 거. 나는 그동안 그럴 여유가 없었어. 몇 년 동안 우울증이랑 싸우느라, 좋다 싫다를 느끼는 감각 자체가 꺼져 있었던 것 같아.

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

근데 전부 기분 탓만은 아니야. 집중이 안 돼. 공부하다가 딴 거 하고, 그거 하다가 또 딴 생각 하고. 한 번에 여러 개를 벌여 놓고 하나도 제대로 못 끝내. 방은 늘 엉망이고.

예전에 의사한테 말했을 때는 "우울증이 집중을 방해한다"는 답을 들었어. 틀린 말은 아니야. 근데 나는 그것보다 더 있는 것 같았어. 약을 먹어서 우울이 좀 나아졌을 때도 이건 그대로였거든.

그래서 거꾸로 생각해 봤어. 우울해지기 전에는 어땠나. 초등학교 때 숙제하다 딴 데로 새고, 물건 맨날 잃어버리고,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힘들었어. 기분이랑 상관없이, 그냥 늘 그랬어.

ADHD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. 우울증이나 기분 문제랑 같이 있는 경우도 꽤 많대. 다만 기분이 아직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그쪽 치료를 바로 시작하기가 쉽지 않대.

아직 진단받은 건 아무것도 없어. 그냥 이번엔 "우울해서 그래요"로 넘어가지 않고, 제대로 물어보려고. 이게 맞다면 지금까지 내가 게으르다고, 의지가 약하다고 탓했던 것들 중에 꽤 많은 게 설명될 것 같아서.

순서

약도 먹고 있는데, 솔직히 요즘은 약이 싫어. 멍한 상태의 일부는 약 때문인 것 같거든. 끊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. 근데 예전에 갑자기 끊었다가 몸도 마음도 크게 무너진 적이 있어서, 이번엔 혼자 끊지 않으려고. 줄이든 바꾸든 의사랑 같이 천천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.

순서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조금 낫다. 기분부터 안정시키고, 그다음에 제대로 평가를 받는 거. 취향 찾기, 사람 관계, 공부는 그다음이고, 지금 제일 먼저 할 건 이 흔들림을 잡는 거야.

그래서 "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됐다"보다는 "아직 덜 채워졌다"에 가까운 거라고 믿어 보기로 했어. 거창하게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대신, 이미 지나가는 것 중에 "어, 이건 좀 괜찮네" 싶은 걸 하나씩 적어 두려고. 노래 한 곡이든, 음식 하나든.

몇 달 뒤에 그 목록을 보면 그게 내 취향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.